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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전화 세줄요약>-----------------------------------------
의심받을까봐 폰을 보여주니, 그녀는 내 말을 믿음.
엘프 마을 장로회에서 내 체류 문제가 논의되었고,
거기서 내 출신을 묻길래 거기서 또 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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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장로들과의 회동은 정보 수집 측면에서 여러모로 유익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전이된 이곳이 소설 리어 월드(Rear World)의 배경 세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 내렸다. 내 출신 세계에 대한 엘프 장로들은 반응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아레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에는 노골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향해왔지만, 스마트폰의 기능을 체감하자마자 좌중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데모가 끝나고 원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듯한 눈치였지만, 엘프 마을 도착한 경위까지 설명을 마치자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 고개를 모아 끄덕여주었다. 장로들은 역시 연륜이 있다 보니 놀라움을 표현하는데도 절제가 있었다. 내 옆에서 꼭 붙어 서서 왠지 모르게 우쭐거리는 표정을 띄우고 있던 아레트와는 조금 다른 면모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전개는 솔직히 내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소설에서도 그랬던가?
"저… 그런데 아레트 님."
나는 앞장서던 그녀를 불러 세웠다. 우리는 회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이었다. 해는 완전히 진 상태였지만 하늘은 구름이 개어 있어, 별과 달의 윤곽이 확연하게 보였다. 아레트는 발을 멈추고 살짝 뒤돌아본다. 그 순간 별빛이 그녀의 비취색 눈동자에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레트 님은 누구십니까?"
바보같이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것은 사실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살짝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전, 뭐랄까… 상징적인 존재지요. 화녹옥을 지키는 무녀라고나 할까"
그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또다시 낯익은 고유명사가 등장했다. 리어 월드에서, 화녹옥은 삼대보옥 중 하나였다. 생명의 돌이라는 이명을 가진 화녹옥 덕분에, 소돌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다른 엘프들에 비해 2배에 가까운 수명을 영유해왔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형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 비열하기 짝이 없는 시온이 아레트의 언니를 속이고 강탈해간 아티팩트가 바로 화녹옥이었다. 삼대 보옥에는 화녹옥 이외에도 자흑옥과 마청옥이 있었는데, 그 중 자흑옥은 파괴에 관련된 특수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청옥은… 안타깝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용히 소설 내용을 짚어가고 있자니, 아레트가 느닷없이 손등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눈을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OK라는 뜻인가? 나는 뭐가 OK라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언젠가 보았던 판타지 영화 속 기사를 흉내 내기로 했다. 어쨌든 여기는 판타지 세계니까. 한쪽 무릎을 지면에 대고 허리를 굽힌 채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감미로운 메론 향이 코끝을 찔렀다.
"꺄, 꺄아!?"
낮은 비명과 함께 눈앞이 번쩍였다. 경쾌한 스냅이 내 오른쪽 뺨을 강타했다. 화끈한 통증은 뒤늦게 찾아왔다. 이윽고 영문을 알아챈 내가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의 얼굴은 전례 없을 만큼 새빨갛게 물들었다.
"냄새를 맡아보라는 의미였어요!"
정색하며 외치는 에메랄드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다고 써 있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오해에서 불거진 사태였지만, 결과적으로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말았으니 사과하기로 했다.
적당히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등을 돌린 상태였다. 작고 동그란 어깨가 미약하게 상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끌어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이, 지극히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취할 필요는 없었고, 취해서도 안 되었다. 얼마 안 가 진정되었는지 아레트는 말문을 열었다.
"제 몸에… 향기가 나잖아요? 그런 엘프들을 아르테미스라고 해요. 아르테미스들은 오직 화녹옥의 수호에만 전념해야 해요. 그래서 소돌을 벗어나서도 안 되고 결혼해서도 안 돼요."
그것을 '아르테미스 제도'라고 한다고, 아레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설정이 있었던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기억이 희미하다는 건 스토리 전개에 그다지 큰 영향이 없다는 의미겠지. 소설에서는 아레트와 초중반에 헤어지고 그 뒤로는 영영 재회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맥거핀으로 사장되어 버린 설정으로 추정된다. 그건 그렇고 결혼도 안 되는구나. 그런 주제에 절친 동생이랑은 잘만 결혼하고 임신까지 하지 않던가? 어, 근데 화녹옥 찾기도 모험의 목적 중 하나였는데, 그건 또 왜 내팽개친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우리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레트는 현관을 지나자마자 신발을 벗었고,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나뭇잎 이불이 구겨지며 건조한 소리가 현관까지 들렸다. 이 엘프 마을에는 놀랍게도,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벗는 한국식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레트님. 정말 괜찮은 겁니까? 제가 무섭진 않으세요?"
나는 신발을 정리하면서 가장 큰 의문을 이제야 입에 담았다.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던 비즈니스 구두는 아레트의 마법으로 새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반쯤 기절한 나를 침대에 뉘이고 나서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했었다고 한다.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던 아레트의 머리맡에는 빛의 구체가 피어나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저게 빛의 정령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내 목소리에 끼리릭 하고 녹슨 기계처럼 고개만 이쪽으로 돌렸다.
"저, 저는 제이님을… 아니 제이를 믿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이쪽과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무리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도 이상한데서 묘하게 고지식하다.
"저는 사실 장로님들과 같은 의견입니다. 다 큰 남녀가 같은 집에서, 같은 침대를 쓴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봐요."
'아직은' 이라는 단서를 속으로 삼키며, 나는 정론을 펼쳤다. 개인적으로 동정은 아니었지만 일에는 순서란 것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내가 무해해 보인다고 해도 만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동거를 허락한다니. 그게 엘프들의 일반적인 윤리관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뭐, 판타지인데다 이종족인 만큼 그런 도덕을 논하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겠다는 아레트의 주장에 장로들은 한사코 반대했다. 그들의 말과 문맥에서 미루어 보건대, 내가 알던 인류에 비해 이 판타지 엘프들이 성적으로 특별히 더 문란한 건 아닌 듯했다.
"괜찮아요. 전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으니까요."
아레트는 자신 있게 미소를 빛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녀는 하급 정령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 하급이라 힘은 약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급 정령이 비교 대상이라 성립하는 이미지다. 나 같은 일반인이 상대라면 목숨을 빼앗는 데 10초 이상 걸리지 않겠지. 그러니 아레트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나 하나쯤이야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기면서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게다가… 같은 침대가 아니에요. 언니 침대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마을에 남는 침대는 그거밖에 없어요."
변명하며 빠져나가려고 하는 아레트지만, 나에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자기 침대와 언니 침대를 가로로 바짝 붙여놓은 시점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대체 왜 무조건 침대에서만 자야 한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고지식한 것도 정도가 있다.
"저는 굳이 침대에서 안 자도 됩니다. 이불 하나 던져주시면 저기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그러자 아레트는 허를 찔린 듯 잠깐 경직되더니, 곧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꼭 침대에서 자야 한단다. 나는 알기 쉽게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이 침대에는 벌레 퇴치용 결계가 처져 있어요. 이 숲에 독충은 없지만… 그래도 바닥에서 주무시는 건 안 돼요"
응? 하지만 그렇다고 침대를 붙일 이유는 없잖아? 그런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녀가 덧붙였다.
"결계는 마력이 있어야만 발동돼요. 딱 침대에 누운 동안에만요. 제이는 아직 마법을 못 쓰니까, 제가 옆에 붙어 있어야죠."
대체 뭐야 그런 편의적인 설정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머릿속 한켠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구조라면 납득이 간다. 벌레 때문에 바닥에는 잘 수 없고, 침대를 따로 두자니 결국 내가 마력이 없어서 침대에서 자는 메리트가 사라진다. 결국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서는 두 사람의 침대를 마주 붙이고, 아레트가 두 사람 몫의 결계를 발동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근데 그러면 너무 부담 될 것 같습니다만…결계 유지하는 데 마력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부담까진 아니에요. 항상 저렇게 붙여 놓고 잤어요. 저, 언니가 떠난… 이후부터는요."
아레트는 쓸쓸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이미 빛의 정령을 물러가게 한 후라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쓴웃음을 띄우면서 결국 침대에 눕기로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낯익은 듯 낯선 천장이었다. 어둠 속에서 아레트의 말이 이어졌다.
"소레트 언니는… 시온과 함께 화녹옥을 가지고 도망쳤어요.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그래도 저는 언니를 이해해요. 아르테미스 제도의 원인이 되는 화녹옥을 가져가서 저 같은 엘프들이 더 이상 아르테미스 제도에 속박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희생한 거니까…"
그렇다면 반년 전인가. 시온은 그렇다 치고 소레트에 대해서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직접 등장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NTR히로인 아레트의 언니라는 강렬한 캐릭터를 잊어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주인공의 두부멘탈을 감안하면, 만약 만났다면 최소 한 페이지 정도는 아레트가 생각나서 괴롭다는 독백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필이면 시온 같은 세계관 최악의 인성 쓰레기와 엮였다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아레트는 언니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간절히 소망하고 있을 테니까.
조금씩 규칙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는 작은 어깨 윤곽을 보며, 나는 이제야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의문이었던 것은 그녀의 작중 행적이었다. 아레트는 이야기 초중반에 주인공 절친의 동생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대로 파티에서 이탈해버린다. 다정한 미남에게 반하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후부턴 화녹옥을 회수하려는 노력조차도 완전히 방치하고 만다. 물론 화녹옥을 찾아내서 아르테미스 제도를 부활시키면 사랑에 큰 걸림돌이 되니까 그 심정은 이해 가지만, 그래도 그건 간접적으로 살인을 하는 꼴이다. 화녹옥이 없으면 엘프들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줄어든다. 주인공 일행이 마을을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희생자가 나왔을 정도이니 그건 증명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천사표 히로인이 실은 천사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아레트 역시 언니처럼 마을을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제도를 내팽개치고 마을 밖으로 나서면 다른 엘프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수중에 화녹옥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위해, 아레트는 마을을 벗어나서는 안 되었다. '화녹옥을 수호하는 무녀' 따위의 표현은 그저 번지르르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은 마을을 위해 인생을 바쳐줄 희생양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전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화녹옥을 도난당해 아르테미스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그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그녀의 고지식함이, 마을 사람들을 향한 죄책감이, 한 사람의 여자로서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죄책감이든 뭐든 간에 싹 다 집어치우고 마을을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동기가 필요했다.
전례는 있었다. 그녀의 언니는 시온이라는 인간에게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레트 역시 언니처럼 외부의 인간에게 그것을 갈망했다. 추남이든 동정이든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상관없었을 것이다. 소설 속 아레트는 생전 처음 보는 주인공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이는 것도 모자라 같은 침대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노골적이고 명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하고 자존감이 부족했던 주인공은 고슴도치처럼 모든 것을 거절했다. 일행이 점점 늘어나고 둘만의 접점이 줄어들수록 마음속 균열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주인공의 소심한 기질에 기인하고 있었다는 걸 아레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정신적 성장을 기다려줄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천사가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만을 봐주고 사랑해주는 다른 누군가가 나타난다고 하면, 흔들리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작은 어깨의 움직임은 이제 완연한 규칙성을 띄고 있었다. 정리할 생각들이 많았다. 살며시 눈을 감으며, 나는 그녀가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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