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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전화 세줄요약>-----------------------------------------
장로들도 믿어주었고 이런 저런 정보를 획득. 
나는 이곳이 소설속 배경 세계라고 거의 확신함.
소설 지식 덕에 엘프 히로인 아레트가 쉬워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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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산들바람에 눈이 뜨였다. 한바탕 기지개를 켜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레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집안 구석 여기저기로 시선을 보내 본다. 얼마 안 가 한켠에 책장들이 늘어선 서재를 발견했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덕분에 발걸음이 가볍다. 먼저 가장 왼쪽에 있는 책장 꼭대기부터 책 제목을 하나 하나 읽어간다. 분명 처음 보는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처럼 저항 없이 읽힌다. 차원 이동물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실감이 뒤늦게 내 머리를 뒤흔들고 지나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장을 완전히 클리어하고 세 번째 책장에서 드디어 원하던 책을 발견했다. 손에 들고 훑어보고 있자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과일 바구니를 든 아레트가 눈부신 미소를 빛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요, 제이. 책 보고 있었어요?" 

 

현관 옆 탁자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으며 상쾌하게 말했다. 곧게 뻗은 그녀의 녹색 머리칼이 잔잔히 흔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마법론>이라는 제목에 조금 흥미가 생겨서요." 

 

아레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어느샌가 내 뒤에 바짝 붙었다. 향긋한 메론 향이 짙었다. 자연스레 기분이 조금 풀어진 나. 반대로, 곁에 선 아레트는 눈을 가늘게 모았다. 

 

"제이… 혹시 그 <마법론>의 저자… 이름이 뭔지 나와 있어요?" 

 

훔쳐본 그녀의 옆얼굴은 진지했다.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책장을 둘둘 넘겨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케이 아헨다렉' 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 순간 아레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건 고대 문자로 쓰여있는 책이에요! 지금까지 아무도 해석 못한 고대마법서란 말이에요!" 

 

아레트는 거의 비명에 가깝게 소리 질렀다. 주먹을 불끈 쥔 양손과 주머니처럼 벌어진 입술이 그녀의 충격을 여과 없이 형용해주고 있었다. 

 

"진정해요, 아레트. 아마 차원 이동한 것 때문에 이런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크게 열린 동공에 볼드체 느낌표와 물음표가 수십 차례 번갈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게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읽어주세요! 그 고대마법서를!"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며 재촉했다. 거의 반 강압에 가까운 등살에 못 이겨, 나는 맨 앞장을 펼치고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서문의 내용 중 반 정도는 신세타령이었다. 마수들에 의해 부모를 잃은 저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마수는 인간이 상대하기엔 너무나 강했던 까닭에 조잡한 무기나 흑마술은 통하지 않았다. 저자는 백마법에만 유일하게 희망이 있다고 믿고, 당시에는 거의 위력이 없었던 백마법에 매달렸다고 한다. 백마법은 술자 주위에 분포하는 마나를 바로 변환시켜 마법을 구사하는 형태였는데, 그래서 거의 위력이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가 생각해낸 것이 마나 축적이었다. 시행착오 끝에, 축적된 체내 마나와 외부 마나를 서로 공명시키는 것으로 마법의 위력이 폭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위력이 너무나 강했기에 마법이 사사로이 악용될 것을 두려워한 저자는 체내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가 완전한 공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불완전한 주문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뭐라구!!" 

 

그 대목에서 아레트가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일반 마법 주문이 불완전한 것이라구? 어떻게 그럴 수가…!" 

 

나는 아레트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내 손길을 눈치챈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제이. 저도 모르게 흥분돼서…" 

"아니에요, 그럼 계속 읽을게요." 

불완전 주문의 위력은 원래 마법에 비하면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지라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처음에는 완전 주문을 아예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마법사들도 알아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의 발견이 완전히 사장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 이 책에 완전 주문을 남기기로 하는 대신, 글자를 자기식으로 변형해서 기록하기로 했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해냈다면 뒷글도 무난히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인간의 무궁한 번영을 빌며, 서문이 끝이 났다. 

아레트는 여기까지 듣고 잠시 침묵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방해되지 않게 잠자코 있자니,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현관 쪽으로 다가가다, 빙글하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새초롬한 표정을 띄우더니 곧 입을 열었다.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아요?" 

"…어디 가는데요?" 

 

내 물음에 아레트는 장난스레 윙크하며 대답했다. 

 

"물론 장로님들께요. 케이 아헨다렉의 책을 해석할 수 있는 대천재가 있는데, 당연히 알려야죠!" 

 

그녀는 그런 말을 남긴 채,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까지의 전개는 마치 소설을 그대로 옮긴 듯한,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살짝 눈을 감으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원작 속 주인공이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가 바로 그 마법론이었다. 저 책을 통해 완전 마법의 존재를 알았기에, 일반 마법으론 불가능한 기적 같은 일들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절친 아내의 불임을 치료한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였다. 물론, 그 전개를 따라갈 마음은 먼지 만큼도 없었다.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다. 취미로 용병일을 하는 금수저 미남 말고도 곤란에 처해 있는 사람은 산더미 만큼 많았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나는 아이를 싫어한다. 

・ ・ ・

그 후의 전개 역시 예상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레트는 장로회에서 봤던 붉은 망토의 엘프 노인과 함께 돌아왔다. 율리엔, 이라는 이름의 엘프 노인은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케이 아헨다렉의 마법서를 엘프어로 번역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하고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기가 가능한 사람을 두 명 정도, 일주일 동안 보내주십시오." 

 

내 요청에 율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옆에서 아레트가 반짝이며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본 그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습니다. 아레트님이 제이를 도와드릴 겁니다. 다른 한 명은… 내일 아침에 올려보내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나는 안도했다. 케이 아헨다렉의 마법론은 약 1000페이지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다행히 빈 페이지와 공백이 많아 글자수로 따지면 40만자 내외로 짐작되지만, 그래도 장난이 아닌 양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걸 혼자 독박쓰고 대략 한달에 걸쳐 번역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나게 고생스러웠을 것 같다. 1초에 한글자라는 페이스로 한시간 동안 쉬지 않고 펜을 놀리면 3600자다. 단순 계산으로 마법론 한권 분량의 글을 베껴 쓰는 것만 해도 최소 8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는 의미다. 게다가 오자, 띄어쓰기, 줄바꿈, 잉크 교체로 인한 타임로스가 없을 리가 없으니, 실제 작업에는 그 두배에 가까운 시간이 들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혼자서 그렇게까지 독박을 쓸 마음은 없었다. 

"그럼 번역 작업은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만, 마법은 지금 당장 지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의도치 않게 약간의 기대감이 드러나고 말았다. 영상이나 글 같은 매체를 통해서만 접했을 뿐, 마법이란 것은 나에겐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흥미가 동할 만은 했다. 율리엔은 내 말에 곤란한 듯 살짝 웃더니, 여분의 종이와 펜을 구해야하기에 지금 당장은 힘들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대답에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어째선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바로 그때, 아레트가 발언권을 달라는 듯 손을 들었다. 

"저! 혹시 저라도 괜찮으면 제이에게 마법 가르쳐줄 수 있어요!" 

 

그녀는 다소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확실히 아레트 역시 마법사다. 나이나 경험은 그렇게 두텁지 않을지 몰라도, 생판 남에게 배우는 것보다는 믿음이 갔다. 율리엔은 살짝 찡그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나 아레트가 그에게 시선을 향하자, 율리엔의 눈에는 체념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장로들이 그렇게나 반대한 나와의 동거마저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아레트다.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럼, 아레트!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녀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집 밖으로 나왔다. 아레트의 말에 의하면 마나 축적에 최적인 장소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녀를 따라 얼마쯤 걷자 나무들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보였다. 군데군데 들풀과 꽃들이 자라나 있었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휩싸여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바깥 풍경과 공터 일대를 번갈아 비교해 보며 눈썹을 모은 결과, 무슨 이유에서 인지 이 공터의 초목들만이 유독 채도가 높고 색이 진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내 이변에 아레트는 살짝 미소지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이 공터는 생명력이 강해요. 마나가 다른 곳에 비해 더 많이 모이는 편이라, 마나를 느끼는 것도 쉽죠. 물론 여기 말고도 비슷한 장소가 있긴 한데, 여긴 장로님들과 저만 사용하는 곳이라 아이소메르라고 불러요. 물론 제이도 괜찮구요. "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일대가 왠지 모르게 색이 진해 보였던 건, 그만큼 마나의 농도가 높아서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을 무지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생명력이 강한 장소라면, 당연히 미생물도 번식하기 좋은 환경일 것이다. 그런데 공기 중에 미생물의 농도가 매우 높다면 그만큼 대기부유물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 일대의 색은 선명하기는 커녕 흐리게 보이는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정말로 이 공터-아이소메르가 생명력이 넘쳐나는 장소라면, 이 공터가 공터로서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이를 발견했죠. 집중해서 명상하고 있는데, 드르렁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곤란했어요." 

 

헉, 하고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딴 생각 도중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한 방 먹었다. 후훗, 하고 놀리듯이 웃는 아레트. 나는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내 반응을 여유롭게 살피더니 공터 여기저기에 분포된 돌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인공적으로 깎여져 있는 편평한 돌이었다.

"앉으세요. 이제부터 마나를 축적하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게요." 

 

나는 약간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착석했다. 딱딱한 감촉과 싸늘한 냉기가 재빠르게 기어올라왔다. 하지만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바로 맞은 편에 앉았다. 

 

"마나는 이 세상에 고르게 퍼져있어요. 우선 눈을 감고 자연에 몸을 맡겨 보세요. 무리하게 느끼려 하지 말고, 우선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단 눈을 감았다. 손 끝과 발 끝부터 조금씩 천천히 힘을 빼기 시작했다. 달콤한 메론향이 섞인, 따스한 공기가 감돈다. 진한 나뭇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잔잔히 흔들린다. 명멸을 반복하는 사고의 파편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 오감이 소실했다. 마치 영겁같은 시간이 흐르고, 전신이 몽롱하게 떠오르는 듯한 감각에, 불현듯 눈을 떴다. 나는 어느샌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기묘하기 그지없는 기분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다시 한 번 천천히 의식을 가라앉혔다. 

"느껴지는 마나를 피부 전체로 받아들여요. 빨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심장 쪽으로…" 

모든 것이 희미해져, 사라져가는 의식의 저편에서 그런 말이 들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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