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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전화 세줄요약>-----------------------------------------
고대마법서 번역작업은 일주일 만에 끝남.
그 후, 마나 수련을 본격적으로 시작.
나는 천재라서 한달만에 마력 7클래스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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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마을에 도착한 지 근 한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아레트와는 연인 관계가 되었다. 마법론 번역 작업은 문제없이 진행되어 이제는 오탈자 확인작업만을 남겨둔 채 내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마나축적 수련은 높은 성과를 보여, 머리를 제외한 신체 각부가 밀도 높은 마나로 뒤덮여 있었다. 정상까지 앞으로 1클래스만을 남겨 둔 상태였다. 지금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면 아마 6, 7일 내에 8클래스에 도달할 테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마법 훈련이다. 율리엔 장로와는 딱 일주일 뒤부터 마법지도를 받기로 약속했다. 단, 집과 수련장-아이소메르를 왕복하는 나날만이 계속 이어져왔기에 엘프 마을의 구석구석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또 아레트, 톨루핀, 그리고 장로들을 제외한 엘프들과는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 이따금 멀리서 쏘아보는 그들의 눈빛만이 인간에 대한 엘프들의 내심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그들의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약 반년 전, 시온이라는 인간이 엘프들을 속이고 생명의 돌 화녹옥을 훔쳐갔다. 그로 인해 400년에 달하는 수명을 보장받았던 그들의 안락한 생활에 금이 가고 말았던 것이다. 율리엔 장로는 화녹옥에 의한 장수가 나태와 몰락을 가져왔다고 지적했지만, 그런 시각이 엘프들의 중론일 리가 없었다.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일방적으로 빼앗긴 것이다. 빼앗긴 자가 분노와 적의를 불태우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자, 나를 향해 슬픔과 원망의 화살이 겨눠지는 것은 일목요연했다. 그날 아침, 스안드란이라는 이름의 엘프 장로가 새벽 2시를 넘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의 부고를 듣고 울먹이는 아레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는 내가 두 번째로 만난 엘프였다. 내 거취 문제를 위해 현관문 언저리를 서성이던 그의 연두색 로브과 풍성한 수염을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아쿠이트라는 마을 광장에서 치뤄졌다. 우리가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백여명 남짓한 엘프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누구도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대부분은 무표정했고 스안드란과 친분이 깊은 몇몇 엘프들만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먼 발치에서 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식이 끝난 후, 아레트는 장로들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논의하고 처리해야 할 공무들이 적지않게 쌓여 있는 거겠지. 슬픔을 체화할 시간도 없이 일정에 쫓기는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히 침울함에 빠져 있다보니 나는 어느새 광장에 홀로 남겨졌다. 날은 거의 정오에 가깝다. 이제부터라도 분발해서 오전 수련을 빼먹은 것을 만회해야지,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너 이 새낀 왜 여기있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소년 엘프가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톨루핀이었다. 그의 눈자위는 붉은 빛으로 짓물러 있었다. 

 

"이 새끼가 왜 여기있냐고! 지금 당장 화녹옥을 찾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울화를 터뜨린다. 내 멱살을 터질 듯이 부여잡고 분노에 이성이 마비된 소년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번쩍, 하고 별이 반짝였다. 격통이 내 왼뺨을 달렸고 어느 샌가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입안이 터진 듯, 짭짤한 쇠냄새가 풍겨왔다. 톨루핀은 쓰러진 내 위에 올라탄 채, 고운 아미를 벌레처럼 찌푸리고 있었다. 

 

"너도 인간이니까 인간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져!!! 당장 화녹옥을 찾아오라고…!"

충격과 아픔이 연달아 내 안면을 강타했다. 내질러지는 둔한 주먹을 보면서도 저항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무심할 정도로 푸른 하늘과 드문드문 비쳐보이는 고통스런 소년 엘프의 표정이 시야에 뒤섞였다. 톨루핀도 자신의 행동이 엉뚱한 화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나를 때리고 닥달해봐야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과 분노에 제정신을 잃어, 그것을 표출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그 소꿉장난에 어울려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 정신은 아직 애새끼인 주제에 주먹의 단단함과 완력만은 어른 못지 않다. 정말 쓸모 없는 데선 어른스럽군. 그 사실이 너무 웃겨서, 완전히 마운트 당해 얻어맞고 와중에도,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이 미친놈이 쳐웃어?! 뭘 잘했다고 쳐웃냐 인간새끼가!!! 죽어!! 화녹옥 찾아오라고…!" 

 

내 이변을 눈치채고 독을 올리는 소년 엘프. 그러나 팔의 힘은 빠졌고 주먹도 둔해질 만큼 둔해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발악하고, 고함치고, 악을 쓰며 폭력을 쏟아붓다 결국 톨루핀은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는 제풀에 지쳐 기진맥진한 상태로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문득 이쪽으로 향해져 있던 시선들을 눈치챘다. 멀리서, 잘 모르는 엘프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지 하고 살짝 원망감이 스쳤지만 그것도 그랬을 것이다. 저들도 심정적으로는 톨루핀에 가까웠으리라. 

나는 약간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시체처럼 완전히 지쳐있던 톨루핀에 반해 나는 의외로 쌩쌩했다. 제일 처음 얻어맞은 건 좀 아팠지만 입안에 머금어진 핏덩이를 빼면 이렇다할 데미지는 없었다. 근처 시냇가에 가서 얼굴을 비춰봐도 사소한 멍 하나 들지 않았다. 과정을 생략하고 전후관계만 보면 내가 톨루핀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걸로 보일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투명한 시냇물을 안면에 끼얹었다. 차가운 물로 입안을 헹구면서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나를 7클래스까지 축적한 것의 부작용일까? 머리를 제외하면 전신이 마나로 빼곡히 들어찬 상태이니만큼, 신체에 조금 쯤은 이변이 생기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시냇가에서 볼일을 마친 후에는 곧장 아이소메르로 향했다. 돌의자에 앉아 마나축적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한참 동안 노력해야 겨우 느낄 수 있었던 마나의 바다가, 이제는 눈만 감으면 언제든지 발밑까지 차올랐다.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겼다.

・ ・ ・

그리고 눈을 열면, 언제나처럼 익숙한 풍경에 밤이 깔려있다. 옆자리는 약속이라도 한듯 아레트가 지키고 있다. 다른 점은 그녀의 기색에 슬픔의 기운이 도드라져 있는 정도. 낮에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 벌써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간 듯했다. 

 

"제이가 톨루핀과 싸웠다는 게 정말이에요?" 

 

어둠이 섞여, 한층 더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가 이쪽을 힐난해왔다. 나는 '싸웠다' 는 단어에 실소가 터져나오려는 것을 정말 간신히 참았다. 타이밍 좋게 입가를 오므리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비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정말…이었군요. 도대체 왜 그런 거에요?" 

 

웃음을 참느라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긍정의 의미라고 받아들였는지, 아레트는 추궁해왔다. 수초간 호흡을 정돈한 끝에 진정된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레트. 그건 싸움 같은 게 아니었어요." 

 

전말에 대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눈에 의심과 당혹과 분노와 실망이 차례로 스치는 것이 보였다. 아레트의 입을 빌어 그녀가 들었던 이야기를 확인해 보았다. 엘프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에 의하면 내가 먼저 톨루핀을 도발했고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마을이기도 하고, 마침 인간에 대한 여론이 가장 안좋을 시기이니 만큼 그렇게 사건이 변질되어 전달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당히 악의에 가까운 왜곡이긴 하지만 그래도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니. 그런 말을 입에 담자,

"말도 안 돼! 그런 법이 어딨어요!! 당장 항의해야겠어요!!!" 

 

아레트는 드물게도 예쁜 얼굴을 검붉게 물들이며 의외로 진심으로 화를 내 주었다. 분노에 차, 당장이라도 달려나가려는 듯한 그녀를 달래느라 곤혹을 치루면서도, 그녀가 내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또 내 편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위안 받았다. 아레트가 어느 때보다도 미쁘고 사랑스럽게 여겨져서, 당장 그 보드랍고 얇은 허리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억센 팔로 그녀를 배후에서 끌어안고, 부드러운 감촉을 즐긴다. 물씬 메론 향이 풍겨 오르며 영혼이 정화된다. 당황하며 작게 벌려지는 입술을 빼앗았다. 가벼운 키스로 끝내려 했지만 혀를 밀어넣어 본다. 한 차례 혀와 입술이 서로 얽혀서 몸부림친 후, 입술을 떼자 투명한 타액이 가느다란 길을 남겼다. 그녀의 흥분은 이제 그 궤도를 완전히 바꾸었고 붉게 상기된 두 뺨에는 요염함이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끌어안고 한참을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정도 시간이 지났다. 장로회에서 긴급소환명령이 떨어졌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장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안도란 장로의 서거 후, 장로회는 율리엔 장로의 자택에서 열리게 되었다. 채비를 끝마치고 아레트의 집을 뒤로 했다. 네 명의 장로들과 아레트는 먼저 회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두막집 현관문을 앞에 두고 나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일이 어떻게 굴러갈 지는 몰랐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결백하다는 점이었다. 어떤 형태로 일이 굴러가건 간에 의연히 대처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마음 먹고 두번 노크했다. 끼리릭 현관문이 열렸다. 한 발자국을 내딛어 집안에 들어선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혼란 때문에 사고가 정지했다. 있어서는 안될 것이 보였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뒤늦게 철렁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오두막집 안에서는 이미 네 명의 장로들과 아레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 엘프 소년 톨루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대신 오두막집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핏빛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칠흙같은 검은 갑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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