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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전화 세줄요약>-----------------------------------------
알고보니 소설상의 강적 중 하나가 벌써 찾아온 것.
나보다 강한 놈이라 말빨로 일단 3일 정도 시간을 범.
미친듯이 마나축적하다 폭주. 쌓았던 마력 다 소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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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지났는 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태양은 아직 정오를 지나기 전이었다. 빠른 발걸음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비어 있었지만 탁자 위에는 알록달록한 과일이 수북한 바구니와 의복류 일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과일 몇 개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탁자 위의 옷가지를 살펴보았다. 중세 유럽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성용 튜닉과 새까만 가죽 부츠, 그리고 갈색 망토와 수수한 단검 하나였다. 나는 그 의도를 단박에 이해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양복과 비지니스 구두는 잘 정돈하여 서류 가방에 넣어두기로 했다. 스마트폰은 어쩔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서류 가방에 보관하기로 했다. 다만 붉은 조각만큼은 잊지 않고 튜닉 허리띠에 매인 가죽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가죽 주머니는 이미 각각 십여 개 정도의 금화와 은화로 채워져 있었다. 짐 정리가 일단락된 다음, 나는 율리엔 장로의 처소로 향했다. 두 번 노크하자 그가 곧 현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 행색을 보자마자 웃음보를 터뜨렸다.
"완전 잘 어울리는구먼. 그래 그래, 훨씬 낫군. 인물이 났어!"
흡족한 듯한 말투로 미루어보건데 이 복장과 장비, 노잣돈은 그가 준비해준 듯 했다. 나는 이전처럼 서재로 안내받았고, 전과 같은 원목의자에 앉아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진한 바다색 눈동자는 온화하면서도 여전히 총기가 살아 있었다. 장로의 어깨 너머에서 건방지게 줄지어 있는 마법서들의 콧대도 여전했다. 오래된 책냄새를 물씬 풍기는 서가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부터 꼬박 이틀이 지났고, 마법론 번역의 오탈자 확인작업도 완료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은 복본을 작성중이라고 말하며 내 도움에 거듭 감사를 표했다. 이윽고 마나축적의 성과에 대해 물어왔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주저했지만 도중에 역류현상이 일어났고 체내의 마나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장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럴리 없네! 마나는 지금도 자네 몸 속에 촘촘히 매여 흐르고 있어. 정진정명 8클래스라네."
그의 말에 힘입어, 다시 한번 의식을 내면으로 향해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눈을 감으면 간단히 떠오르던 마나의 바다도, 지금은 완전히 메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자 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생각하더니 갑작스레 한 가지 가설을 입에 담았다.
"어쩌면 단 한번도 주문을 쓰지 않았기에 그럴지도 몰라. 그 상태로 8클래스에 도달해버려서, 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일 수도."
뇌가 체내에 마력이 흐르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인식해버려서, 보이지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보통'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해왔다.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가 호르몬의 변화나 혈류의 흐름, 내장기관의 움직임을 감각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마나를 느끼지도 조작하지도 못하게 된 것이라는 의미였다. 기껏 8클래스까지 마나를 모았는데, 따위의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나의 역류와 폭주를 경험하고도 되살아난 것이다. 목숨을 잃을 지도 몰랐던 상황에서 구사일생한 데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력도 온존되었다니, 그 이상을 바라면 천벌을 받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고 있자니 조금 쯤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진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상황은 전보다 오히려 심각해졌다고 할 수 있는 데도.
내가 그런 잡생각에 빠져있던 사이에 율리엔 장로는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서랍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겉면에 거목과 그 주위로 새들이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의 밀랍 봉인을 찍었다.
"이노데우스 데커릭… 그는 내가 아는 유일한 8클래스 마스터야. 천재 중의 천재지. 그를 찾게나. 이걸 보여주면 분명 자네의 힘이 되어줄 터."
8클래스 마법사라면 지금의 내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장로의 추천장을 품 속에 넣으며, 나는 목례했다. 현관까지 마중을 나온 그의 모습에 또 한 차례 목례했다. 온화하게 주름짓는 얼굴을 뒤로 한채, 나는 몸을 돌렸다.
곧장 아레트의 집으로 향하려던 도중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찬란한 금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미소년 엘프, 톨루핀이었다. 위아래로 사정없이 들썩이는 어깨와 진정되지 못한 호흡을 보면 여기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것 같았다.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보며 속기작업의 강행군에 지쳐 녹초가 되어버린 모습과 고래고래 악을 쓰며 분노하던 모습이 번갈아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사랑의 큐피트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만약 토르핀이 그때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아레트가 그날 밤 저돌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첫날 밤 같은 태도가 한달 내내 꼬리를 끌고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톨루핀은 대체 왜일까? 무슨 용건 때문인지 궁금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멍하니 선 채, 이쪽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호기롭게 날 가로막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츤데레처럼 주저하는 그 모습에 나는 먼저 말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뭔데?"
아, 하는 울림. 그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한 채 꼼지락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저번 일은 미안했다."
예상대로의 레파토리. 그래도 사과하러 와 준 것을 보면 이 녀석도 나름대로 성장한 것이다. 잠자코 얻어맞아준 보람이 약간은 있는 듯 했다.
"뭘. 난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어"
나는 무미건조한 인사치레를 남긴채 그를 뒤로 했다. 아니, 완전히 뒤로 하기 바로 직전.
"아레트를 잘 지켜줘라"
그런 말을 소년엘프에게 전했다.
・ ・ ・
그리하여 정겨운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현관 문지방을 넘자마자 좋아하는 메론향이 물씬 풍겼다. 아레트는 침대 머리맡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그 눈빛에 주춤했다. 여느 때처럼 눈부신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저, 저도 함께 가겠어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입에 담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끌어안았다. 천 한장을 사이에 두고 조금 봉긋한 가슴과 티없이 맑고 고귀한 피부가 느껴졌다. 팔뚝 아래에서 눈부신 녹색 머릿결이 흐트러졌다. 가볍게 손으로 등을 감싸자 그녀는 더욱 매달려 왔다. 키스를 하자, 정교한 속눈썹 사이로 싱그러움이 스며들었다. 얇고 섬세한 완성도의 작은 입술은 축축히 젖어 있어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달콤한 타액의 맛을 느끼며, 나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해오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혼자 갑니다. 도망치기만 하는 거니 혼자가 훨씬 나아요. 일단 최선을 다해 도망치겠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조각을 파괴할거에요."
고개를 숙인채 조용히 듣고만 있는 아레트. 표정은 알수 없다. 조금이라도 안심했으면 하는 바람에 나는 다짐하듯 말을 덧붙였다.
"절대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모두를 위해 잠시 떠나는 것 뿐이고,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에요."
당연하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놈들의 표적은 이 붉은 조각이고 이것의 위치를 특정할 수단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조각을 가지고 떠나면 일단 이 마을은 안전해진다. 그 후 온 힘을 다해 도망쳐서 추적을 뿌리칠 수 있으면 그걸로도 좋고, 뿌리칠 수 없다면 조각을 파기하면 된다. 해머 같은 걸로 내리치거나 용광로에 던지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 되지만, 세계 멸망이나 자신의 죽음보다는 그 결말이 훨씬 나았다.
"저것들을 가지고 있어줘요"
나는 탁자 위 서류가방에 정리해 둔 소지품을 가리켰다. 현실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다니던 회사에 대해 떠올렸다. 나쁘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전부다 원래세계로 돌아갈 때 필요한 것들이에요. 나 대신 잘 보관하고 있어줘요."
그녀는 대답 대신 내 등을 한층 더 강하게 쥐어왔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면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마음에 약간 심술이 일어, 반격하듯 탐스러운 목덜미를 입술과 코로 애무하자,
"꺄핫!?"
이채롭게 빛나던 비취색 눈동자가 점이 되며 비명을 흘렸다. 허리를 비틀며 벗어나려는 가녀린 몸. 그것을 완력으로 억눌러 세게 안으면서 또 한번 키스한다. 입안에서 젤리처럼 끈끈하고 부드러운 혀가 얽혔다. 구강으로 흘러드는 투명한 타액을 음미하며, 두번 다시 없을 이 순간의 감미로움을 즐겼다.
그리고 나는 현관에 섰다. 준비는 마쳤다. 후회라면 늦었다. 불과 한달 사이에 그녀에 대한 감정이 연모로 바뀌었다고 한들,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처음에는 솔직히 경계했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그저 사랑을 하고 싶어했던 소녀였기에, 굳이 내가 어울려 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싹이 처음에 어떤 형태를 하고 있었건 간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지내왔던 그림자가, 색을 바래는 일은 없었다. 그녀와 공유했던 생활의 귀퉁이는 그래도 소중하게 내 기억을 물들였다. 올려다 본 푸른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높고 청명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마음까지 서늘하게 씻어주는 듯 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마지만 순간, 그녀가 기대왔던 어깨가, 살짝 젖어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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