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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갱단은 어떻게 미국을 장악했나?

4대 갱단은 NSA, CIA, FBI 및 DEA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NSA는 주로 암호 해독과 각종 첨단장비를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CIA는 스파이 등을 양성해 정보를 수집했고, FBI는 수사기관이자 방첩임무를 도맡아했고, DEA는 마약 단속국으로서 마약 밀수와 미국 내 마약 유통의 단속 및 예방을 담당하던 조직이었습니다.

세간에는 CIA와 FBA가 잘 알려져 있고, DEA도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NSA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4대 갱단을 구성하는 정보기관 중 가장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NSA였습니다. NSA는 1952년에 창설된 미국 국방부 소속의 정보기관으로, 워낙 은밀하게 활동하는 경향이 있어 세간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았으나, 가공할 정도의 정보수집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NSA는 1950년대부터 당시 적대국이었던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발신・송신되었던 전신, 전화 및 무선 통화의 상당수를 1992년까지 파일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20년 동안 해독은 못했지만, 암호화된 통화조차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본고장이었던 미국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NSA는 미국 전역의 모든 사무실에서 발신된 전신・송금・전보에 대한 모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즉, 미국내 거의 모든 정보를 NSA가 쥐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NSA가 4대 갱단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막강한 조직이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NSA는 미국 국내든 해외든지 간에, 어떠한 법적 제한도 없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60년대 NSA는 1년에 22,000명 이상의 분석가를 고용했는데, 문제는 NSA 요원들 중 대부분은 국방부 소속이든 아니든, 정부측이 추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겁니다. 엄청난 비용이 어처구니없는 서류 작업으로 낭비되었지만, 정부 측은 이러한 낭비를 인식하지조차 못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는 했지만, 각각이 독립된 존재였습니다. 미국 정부 역시 때로는 이들끼리의 경쟁을 유발시키기도 하여, 이들 간의 연계를 어느 정도 차단하는 것으로 말썽의 소지를 없애왔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은 1989년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20세기의 대부분을 휩쓸었던 냉전이 종식되자, 자신들이 지녔던 권한 축소를 두려워한 이 4대 정보기관이 모여4대 갱단(Gang of Four)」이라는 비밀 연합을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 뒤에 숨어 미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통제하려 했습니다. 

 

 대붕괴 촉발과 계엄령 선포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만, 미국 정부의 눈과 귀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서로 담합하자, 미국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 4대 갱단의 실질적인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4대 갱단의 손에 의해 미국은 파나마 운하의 보호를 빌미 삼아 「제 1차 중앙 아메리카 전쟁(First Central American War, 1990~1994)」을 일으켰고, 「유럽 경제 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설립되자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유럽과 아시아 주식시장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해킹하여 주가 조작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보타주(Sabotage)와 조작행위는 유럽 측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고 폭로당하며「94년의 추락(Crash of '94)」을 낳았고 그 후폭풍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대붕괴(The Collapse)」로 이어지며 미국 경제를 파탄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두려워하던 4대 갱단은, 1차 중앙 아메리카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미군을 자국으로 철수시키는 결정을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들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많은 주 정부가 파산을 선언하고 수십만명의 폭동이 일어나는 위기사태에 직면하고도,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 수많은 비밀 작전을 제멋대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NSA는 1996년 8월 17일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메인과 캘리포니아에서 암살하기까지 합니다.

이후 공석이 된 미국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합동 의회가 소집되었지만, 터무니 없는 수준의 내분으로 인해, 의견은 끝내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끝내 국방장관이었던 조나단 수어드(Johnathan Seward)가 의회 연설을 요청받았습니다. 오후 3시 정각에 시작된 이 연설에서, 수어드는「계엄령(Martial Law)」을 선포했고 헌법을 유예했습니다. 중앙 사령부는 국회 의사당 주변에 배치되었으며,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임시 군사 정부로 권력을 이전했습니다. 

 

 MIC의 등장과 갈등

이때부터 사태는 4대 갱단에게 점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합동 참모 본부 의장이, 국방에 관련된 9개의 정보기관들의 수많은 중복 임무들을 제거하기 위해, MIC(Military Intelligence Cooperative)를 구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MIC는 오랜 경력을 갖춘 군사 정보 요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NSA와 CIA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립성을 유지했습니다. MIC 설립 동기 자체는 어디까지나 비용절감을 위한 노력에 가까웠지만, 군사 정부가 이런 움직임을 취하자 4대 갱단 측은 자신들의 진정한 동기를 발각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NSA를 필두로 MIC에 대한 사보타주가 여러차례 시행되었고, MIC 측도 처음에는 NSA로부터 공격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NSA 역시 미 국방부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경쟁이 발생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안가 MIC의 지도층은 CIA, FBA,DEA와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챘고 불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MIC의 리더들은, 이 4개의 조직들이 작당을 하면 얼마나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IC와 군사 정보계의 몇몇 이론 수학자들은, 여러 정보기관들이 동시에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불일치가 발생한다는 점을 알아냈습니다. 예를 들면 1996년 4월, 알렉시아 발렌즈(Alexia Valenze)라는 소녀가 NSA와 CIA 요원들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중요인물도 아니었고, 라스 베가스 보고서에 따르면 그냥 쇼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암살에는, 미국 정부에서 수천 달러의 비용을 들이는 정치적 암살과 동등한 수준의 자원이 소모되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추적한 결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국무부의 유령 사무실로부터 암살 지시가 내려왔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죽음에 대한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 중 화룡정점에 이른 것은「중동 붕괴(Mideast Meltdown)」사태 당시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7년, NSA가 "중동 붕괴(Mideast Meltdown)" 기간 동안 이스라엘 정보국과 국방부로부터 입수한 대량의 위성 정보를 제출하지 않았고, 이는 명백히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NSA는 중동 지역에 300명이 넘는 요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MIC에게 어떠한 정보도 전달하지 않은채 그대로 철수했습니다. 

NSA는 의도적으로 모든 위성 사진의 제출을 2시간 동안 보류했고, 정부측이 이 정보를 입수한 시점에서 이미 러시아의 구식 미사일 발사차량은 공격태세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막대한 군사적 자산을 잃고 말았습니다. NSA는 발각되지 않았던 요원들을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만약 요원들을 철수시키기 전에 군 측이 먼저 군사적 조치를 취했더라면, 그 즉시 전쟁을 촉발되었을 것이라고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첩보 전쟁과 4대 갱단의 몰락

그러나 잃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해 말, MIC는 미 국방장관이자 실질적인 대통령 역할을 수행했던 조나단 수어드(Johnathan Seward)의 지시 아래 국방부는 정식 심문을 시작했고, 이후 미국 정부와 4대 갱단의 숨바꼭질 같은 첩보 전쟁이 수년간 뒤따랐습니다. 이때 수어드는 4대 갱단 같은 강력한 조직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군대가 당시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던 폭동과 약탈을 막아내는데 급급했었다는 점입니다. 이때「연방 무기 법령(Federal Weapons Statute)」을 도입하었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자기 자신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 휴대가 공개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개인이 총기라는 무력을 갖추게 되자 폭도들은 제멋대로 날뛰기 힘들어졌고, 이 법령을 통해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서 폭동을 30%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서 미국 정부는 4대 갱단 척살에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제아무리 4대 갱단이 날고긴다 한들 미국 정부를 상대로 이런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정부 측의 공세에 의해 4대 갱단의 영향력은 계속적으로 약화되었고, DEA와 FBI는 제거되었으며, 4대 갱단의 대부분은 기업 측으로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이에 정부측은 1999년에 계엄령을 해제하는 등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습니다.

 

2002년 웨이스팅 전염병(Wasting Plague)의 피해를 입은 지역을 방문하던 조나단 수어드가 폭동에 휩사여 사망했으며, 합동 참모 본부 의장인 윌리엄 뉴웰(William Newell) 장군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 직후, NSA와 CIA의 공작에 말려들어「2차 중앙 아메리카 전쟁(Second Central American War)」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신속하게 미국을 휩싸는 거대한 재앙으로 발전했으며, 군 내부와 CIA 반(反)쿠데타 조직 내에서 4대 갱단의 끄나풀을 축출하는 대규모 개혁을 촉발시키게 됩니다.

당시 군 휘하의 특수 공작 작전부(Special Operations Command, SOC)의 반 정도는 CIA와 접점이 있었고, SOC의 국장은 CIA출신이었습니다. 뉴웰은 이 연줄을 십분 활용하여 4대 갱단의 추악한 본심을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뉴웰은 특수 작전 사령부의 일원들에게 완전한 불기소 특권을 허락했고, 이를 통해 4대 갱단이 전임 대통령인 존 수어드를 포함한 13명의 연방 정부의 일원의 사망에 관여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SOC의 증언에 힘입어 CIA는 NSA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협조했습니다. 

2004년 3월, 워싱턴은 NSA와 CIA의 중간급 요원간의 항쟁으로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CIA는 신정부 체제로 편입될 수 있었고, 반대로 NSA측 인사들은 공직에서 일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시점에서는 NSA 잔당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이들을 전부 박멸하기 위한 첩보 전쟁은 이후로도 4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이 지속된 전쟁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던 미국의 첩보 인프라와 미군의 입지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남겼고, 이것은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게 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참고
「Cyberpunk 2020 - Home of the Brave」MACDONALD, M. / 1992

「Cyberpunk 2020. 2nd ed.」, PONDSMITH, M.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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